책 '생각의 탄생'은 천재가 되는 비법서이다. 13가지 비법을 소개하고, 모두 익히면 천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비법서가 그러하듯, 그 비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식지 않는 열정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처럼 집에서는 쌍절곤을 돌리고, 수업 시간에는 몰래 절권도를 보며 악력기를 놓지 않을 정도의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역시 천재가 되는 건 쉽지 않다. 절권도가 내 책상에 꽂혀 있다고 무림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 부분은 도움이 되겠는데', 혹은 '이 부분은 나도 그렇게 한 적 있어’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아, 난 천재가 될 수 없겠구나’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릴 때 읽었던 '성공하기 위한 7가지 자세’와 같은 자기 계발서는 읽고 나면 그래도 꿈과 희망이 3일은 갔는데, 이 책은 덮자마자 천재와 나의 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이나 멀어 보일 뿐이다. 이 책은 나에게 무용지물인가?
사실 난 비법을 모두 익혀 천재가 된다한들 써먹을 데도 없다. 회사에서 '창의적 사고'를 발휘할만한 분야도 별로 없고, 그런 ‘창의적 면모’는 ‘또라이’로 찍힐 가능성이 99%나 된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했던가? 천재도 환경이 조성돼야 나온다. 우리나라는 노벨 과학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모 과학자는 향후 10년 동안도 받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유는 창조적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구조에 있다고 본 것이다.
‘생각의 탄생’은 부부인 로버트와 미셸이 공동으로 저술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부부는 전문가 양성이 아닌 전인을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험에서 아무리 100점을 맞아도, 현실에서 토크의 원리를 이해 못해 문을 못 여는 ‘존’과 같은 학생을 양성하는 교육 방식으로는 더 이상 복잡한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고 한다. 문제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생각의 힘을 키울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서문에 소개된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의 이 말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100 퍼센터 공감한다. 부부가 한 질문의 방향은 분명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독자와 천재의 거리를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멀게 만든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천재가 될 수 없다’는 좌절을 ‘천재가 되고 싶지 않아’라는 반항의 감정으로 바꾼다. 이 책은 나처럼 평범한(천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정말 무용지물인 걸까?
‘생각의 탄생’은 과연 누가 읽을까? 누구에게 필요한 책일까? 47쇄(2016년 기준)나 찍었다니 놀랍다. '생각의 탄생'의 목적을 ‘자기 계발서’로 본다면 이 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우선 게으른 CEO일 것이다. 그들은 이 책을 직원들에게 읽히고 싶어 할 것이다.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직원을 만들고 싶어 할 테니까. 물론 CEO, 본인들은 안 읽었다. 500원 건다. 읽었다면 ‘창조적 사고’보다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기업에서 이 책을 사들여 권장 도서로 선정했다면 47쇄나 찍은 게 이해는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행에 민감한 민족이므로.
책의 원제는 ’Spark Of Genius’다. 세상을 바꾼 천재들이 어떻게 창조적 생각을 했는지, 자료를 모아 13개의 비법으로 분류해서 독자에게 소개한다. 13가지 비법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무릎을 치며, 자신의 창조적 사고를 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천재들의 에피소드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 책을 보는 데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요소다.
그러나 13가지 생각도구를 병렬식으로 구성해서 풀어가는 바람에, 뒤로 갈수록 (천재들의 스파크와 정확히 반비례하면서) 독자의 스파크는 점점 꺼져간다. 강동원이 친동생이고 김태희가 친누나인 느낌이랄까. 무릎을 치며 읽어가던 손은 어느새 귀를 후비고, 코를 판다. 책에 흘린 침을 ‘수수수우웁’ 수습하고 나면, 381페이지가 볼따구니에 복사되어 있다. 13가지 비법은 사실 순차적이거나 병렬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창조적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13가지 비법은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고 복합적으로 한 번에 일어나기도 한다. 통합적 사고를 강조하는 이 책을 이런 구성으로 서술한 점은 다소 실망스럽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를 자꾸 천재가 되어야 한다고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자꾸 무언의 압박을 받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생각의 탄생’은 충분히 좋은 책이 될 수 있다. ‘생각의 탄생'을 '천재가 되기 위한' 비법서가 아닌 '풍요로운 일상을 만들기 위한' 인문서로 읽는다면 말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좀 더 나은 통찰력을 줄 것이다. 삶도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음악을 들을 때는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고, 시를 쓸 때는 글이나 말이 아닌 장면 따위를 시각화하고 그걸 글로 옮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물을 볼 때는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닌 ‘그것이 무엇이 될까’에 착안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바이올린을 들으며 송진 냄새는 못 맡을 것 같고 오보에 파트에서도 갈대를 맛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교육의 목표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고, 직장에서는 쓸모 있는 인력으로, 시장에서는 잘 속아 넘어가는 소비자로, 국가에서는 순종적인 국민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는.
‘생각의 탄생’을 비법서로 읽는다 해도 결코 무용지물은 아니다. 적어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자기 발견, 혹은 더 나아가 자아성찰의 교훈만큼은 확실히 심어 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천재가 아니며, 천재는 다른 차원의 일임을. 혹시 이 교훈을 얻지 못하신 분이라면, 혹은 ‘또라이’가 되는 게 꿈인 분이라면 이 ‘비법서’를 익혀도 좋다.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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