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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하이젠베르크의 진실, <브레이킹 배드>

 
브레이킹 배드 시즌 4
 
시간
일 오후 10:00 (2011-07-17~)
출연
브라이언 크랜스턴, 안나 건, 아론 폴, 딘 노리스, 벳시 브랜트, 밥 오덴커크,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조나단 뱅크스
채널
AMC

 

<브레이킹 배드>는 최고의 드라마다. 완벽한 각본, 현장감 넘치는 카메라, 배우들의 연기력 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매 시즌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상을 휩쓸었으니 두 말하면 무엇하랴.

 

<브레이킹 배드>는 뉴멕시코주에 사는 한물간 천재 화학자 월터 화이트의 이야기이다. 월터는 작은 도시에서 낮에는 고등학교 화학 선생으로 저녁에는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과 함께 근근이 살아간다. 열정도 즐거울 것도 없는 삶이다. 무기력과 체념이 이미 몸에 벤 상태다.

 

그러던 어느 날 월터는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죽음은 오리려 잠들어 있던 그의 내면을 깨운다. 그는 더이상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처럼 해방과 자유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가 가장 잘하는 화학을 활용해 마약 제조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권력은 총체적 권력을 지향하고, 승리는 승리의 남용을 지향한다고 했던가. 월터는 마약 사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와 불순물이 끼어들고 그는 더 집요하고 더 예민한 독재자가 된다.

 

나는 <브레이킹 베드>의 주인공인 월터 화이트를 통해 인간에 대한 경탄과 슬픔을 봤다. 그가 죽음 앞에서 보여준 삶은 곧 인간 군상의 모든 것이었다. 우리는 왜 사는가. 희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인간 문제의 근원은 인간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은 한 인간을 망치기도 하고 심지어 죽여버리기도 한다. 반면에 다시 살아갈 힘을 주고 또 성장할 기회를 준다. 인간은 그런 욕망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성의 손으로 참고 인내하며 타인의 눈치를 보고 고상한 척할 뿐이다.

 

Photo credit:  Wallpaper Abyss

 

<브레이킹 배드>를 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르마조프의 형제들>을 여러번 떠올렸다. 인간은 결코 획일화될 수 없고 단일한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음을 확인했다. 선과 악, 이성과 감성, 독단과 자유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게 바로 인간이다.

 

나는 월터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독재자의 얼굴을 하게 되는지 지켜봤다. 그러다 히틀러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았고, 마침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바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됐다.

 

인간은 어째서 그토록 비겁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지. 수많은 의문들이 저 머나먼 소크라테스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내 삶 여기저기에 널려 있음을 느꼈다.

 

<브레이킹 배드>는 표면적으로 새드 엔딩이지만 월터의 입장에서만 보면 분명 해피 엔딩이다. 사슴을 먹는 사자를 보고 누가 도덕이라는 잣대를 댈 수 있는가. 인간 욕망의 발현에 선이냐 악이냐를 따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들었다.

 

<브레이킹 배드>의 모든 등장인물은 모두 '카르마조프적'이며 '하이젠버그적'이다. 모두가 선과 악, 이성과 감정, 좋음과 나쁨, 그리고 독단과 자유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며 살아간다. 잔인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것은 꼭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무명 속에서 죽어간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된다는 데 더 혼란스럽다.

 

<브레이킹 배드>의 잘 짜인 각본은 우리를 더 깊은 카타르시스로 이끌며 정신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이 드라마를 최고로 만들었다.  과장된 클로즈업과 날것의 카메라는 마치 흔들리는 인간에게 변명을 부여하듯 모든 상황을 현실감 있게 만들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캠코더를 들고 유언을 남기는 월트 화이트의 모습’에 드라마의 모든 진실이 담겨 있다. 오직 자신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던 위대한 월터 화이트의 잡아먹을 듯한 시선은 아직도 나를 노려보는 듯 하다.

 

월터는 그가 쌓은 성이 모래 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살아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월터는 월터니까 월터의 삶을 살아야 했다.

 

"Say my name."

 

가장 기억에 남는 월터의 대사다. 월터는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남들로 하여금 자신이 '왕’처럼 보이길 바랬다. 타인이 보는 것은 그저 껍데기일 뿐인 것을. 존재의 고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메시아적인 동경이 그를 해방과 함께 파멸로 몰아갔다.

 

<브레이킹 배드>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체적인 상황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인간 군상의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음을 앞둔 월터가 갖고 싶었던 것은 살아 있다는 생경감이다. 그걸 갖기 위해 그는 '브레이킹 배드'(*브레이킹 배드는 남미 관용어로 '막무가내로 나아가다'란 뜻임) 했다.

 

점점 악마로 변해가는 월터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그의 욕망이 우리들의 욕망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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