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권 사상
<명량>,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들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무렵 나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를 읽었다. 책 표지에 녹아내리고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며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빌딩숲, 자동차, 도시인들. 나는 무엇보다 출근 시간의 지옥철을 떠올렸다. 1제곱미터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으며, 타인의 존재 자체가 몹시 불편한 공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는 마치 살려달라는 절규로 들리곤 한다. 사실 사람들은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도시를 선택했다. 하지만 도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쇠퇴시키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다. 물론 도시 뒤에는 자본 권력이라는 하나의 무리가 장막 뒤에 숨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양상되는 실존적 고통 속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격렬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반응을 바로 도시권에 대한 호소라고 하였다. 도시권 사상은 거리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형성되어 억압을 당하며 절망하는 사람들의 도와달라는 절규, 생계유지를 위한 요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
부의 집중
화폐 권력은 끊임없이 도시를 생산・확장해 간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강탈하면서 자본을 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공간의 형성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과잉자본과 노동을 흡수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 결과 전 세계 상위 2%에 속하는 부자들이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게 됐다. 반면 하위 5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전체의 1%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2013년을 기준으로 볼 때, 상위 10%의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62%를 차지하고 있다. 약 25년 전에는 50%가 조금 넘었었는데, 그 사이 10% 포인트 이상 그 비중이 불어난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부의 재분배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에서 도시가 중심적 역할을 하므로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도시로부터 형성되는 도시권이 왜 화폐 권력에게 독차지 되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태원, 그 브랜딩의 가치는 누가 가져야 하는가?
최근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가장 Hot한 거리로 뜨고 있다. 그러나 불과 5-6년 전만해도 슈퍼와 세탁소가 있는 동네 상권에 불가했기에 임대료도 지금에 비하면 매우 저렴했다. 이태원 중심가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에 터를 잡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색적이고 감각있는 인테리어를 적용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리단'이라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경리단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경리단길'도 이태원의 중심가처럼 곧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했고, 심지어 대기업이 손을 뻗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경리단이라는 새로운 브랜딩은 지역 주민의 (차별화된)노동과 생활 방식의 총합에서 생산된 가치이지만, 결국 자본이 상품화하고 화폐화시킨 형태로 인클로저하고 영유하게 된 것이다. 즉, 수익 증대에 기여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임에도 불구하고 수익이 증대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을 자본이 흡수해가고 있는 것이다. 홍대와 가로수길도 이와 같은 형태로 임대료가 오르고 대기업이 들어오면서 자본에게 (대부분의) 도시권을 강탈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노동자가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나름의 생산방식을 개발하여 수익 증대에 기여했어도, 혹은 실제로 자본 권력과 싸워 실질 임금(혹은 수익)을 얻어냈다 해도, 임대료 상승과 같은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착취활동이나 약탈 활동을 통해 자본가는 그만큼을, 아니 그 이상을 손쉽게 도로 가져간다. 하비는 집합적 상징자본에는 상당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다고 하면서, 주민 모두가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름의 방식으로 집합적 상징자본의 축적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그 중 어떤 계층이 이익을 거두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의 공유재가 사회적 이익을 위해 생산되고 보호되고 이용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인식은 화폐 권력에 저항하는데 필요한 기본 뼈대라고 주장 한다.
2014. 2월 이태원 경리단길
우리는 은행 대출을 받아, 자본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다.
하비는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징후는 썩 바람직하지 않다. 주택 부문의 경기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데다 새로운 주택 건설은 정체와 쇠퇴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공적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고갈되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가운데 누구나 두려워하는 더블딥이 나타날 징후가 역력하다.”
도시 공간을 형성하는 활동은 장기적으로 투기성이 강하다. 투기적 금융과 짝을 이뤄 돌아가는 부동산 시장의 호황과 불황은 거시경제 전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금융기관이(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내놓는 정부가, 거기에는 토건족의 적지않은 입김과 로비가 있었을) 저리로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주택값과 전셋값은 하락했을 것이다. 이미 구매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대출로 집을 사라고 부추기고, 그로 인하여 집값과 전셋값을 떠받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금융기관은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버블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화폐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차지하는 부의 몫을 공격해 수익성을 회복시키려 하는 것과 다름아니며, 이것은 소비가 부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리케리아트
하비는 신자유주의에서는 극심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윤리가 인격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규범으로 작용하며, 그 결과 대도시에서는 개인주의적 고립감, 불안, 신경증이 나날이 증가한다고 언급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 안이 아닌 도시로 나오고 있으며, 전통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른바 프리케리아트로 바뀌고 있다. 프리케리아트는 이 시대의 모든 민중을 의미한다. 빚으로 얼룩진 대학생, 갑의 횡포에 시달리는 대리점(편의점, 우유 판매점 등) 또는 협력업체, 하청업체 노동자, 계약직 노동자, 재개발로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 감당할 수 없는 집값에 대출이 수천에서 수억에 이르는 일반 가정, 정리해고 노동자들, 거기에 일반노동자 등이 바로 그들이며, 또한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도시를 상대로 정확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은 도시로부터 생산되는 잉여에 대한 분배를 사회화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된 새로운 공동의 부를 확립해야 한다면서, 도시 네트워크를 통한 운동은 계급적 지배와 상품화된 시장의 결정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 꽃피는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했다. 그 길을 모색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하비와 같은 사회과학자가 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선명하고 명확하게도 바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한계
도시권의 모호한 개념만큼이나 자본에 대항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하비의 견해는 때때로 안갯속에 가려진 듯하면서도, 유토피아적인 견해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그렇다할지라도 그의 고민과 주장은 옳은 것이며, 그것이 99%의 민중을 향한 것이기에 정의롭다할 수 있다. 세상이 사회과학자보다 빠르게 돌아간다면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유턴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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