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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불안] 현대인은 왜 불안한가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과거 어느 때도 이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절은 없었다. 수도꼭지를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고, 냉장고에는 언제든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들로 가득차 있다. 가끔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기분 전환으로 수백만 원 대의 핸드백을 살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그 이면에 풍요로움 그 이상의 ‘환상’을 불러왔고 그 ‘환상’은 다시 ‘끊임없는 욕망과 불안’을 동반하고 있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알랭드 보통의 말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알랭드 보통은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와 낮은 자존감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면서, 이제 신이 죽어 버린 세상에서 인류의 목적은 분명해 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돈’을 능가하는 가치는 사라져버렸고, 온 국민이 ‘부자 되세요’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화입마하는 일상이 현실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서로를 동일시하는 환각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도록 내버려 두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사람들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서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결국 평등이라고 불리는 사회 속에서 뿌리 깊은 불평등 의식에 지배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삶은 스트레스 그 자체가 되었다. 니체의 말처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견뎌내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출처: 한겨레

 

 

 

 

알랭드 보통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돈’을 모을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잘생겼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사람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사랑’과 ‘존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환경과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물근성’에 쉽게 물들곤 한다. 현대인들은 명함을 보고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며, 또 그렇게 판단되어지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걸려 있다.

 

 

 

게다가 ‘속물’이라는 병은 애초에 완벽히 집단적인 성격을 띤다. 집단은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기 보다는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종종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생각, 또는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관념은 대부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논리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실질적인 궁핍을 급격하게 줄여나갔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함께 찾아온 평등사회의 도래는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그 궁핍에 대한 공포를 오히려 더 확산시켜 왔다. 우리 자신과 비교해야 하는 사람의 숫자가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며, 또 시기해야 할 사람의 숫자도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미디어와 인터넷의 확산은 그 범위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장시키고 있다. 그것은 곧 TV 속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알랭드 보통은 거기에 현대 사회의 전유물인 능력주의가 현대인의 불안을 더욱더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능력주의는 ‘가난’을 ‘개인의 실패’로 규정하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혁명이 실패한 시대에서 우리는 누구의 쇠사슬이 더 값비싼 쇠사슬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투와 시기를 반복하며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능력주의는 현실 속에서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겉으로는 정당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직의 피라미드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불안’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알랭드 보통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그리고 보헤미아 이렇게 다섯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을 강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예술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로 그 공감의 울림과 확산의 범위가 가장 크고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려 정의하자면,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복잡하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인 것이다.

 

 

신문 기사를 보면 매우 자극적이고 단순한 헤드라인이 많다. “집착녀 결국 자살”, “아버지에게 대들고 집나가 결국 강도질”, “사기 결혼, 그리고 집나간 마누라” 등 이처럼 신문은 ‘패배자’에게 ‘공감’을 얻을 기회조차 앗아가 버리는 냉혹함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예술에서는 이 이야기들은 “인어공주”, “홍길동”, “선녀와 나뭇꾼”으로 읽힌다. 예술은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변명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와 공감이라는 무대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사람들은 타인을 끊임없이 규정하면서 정체된 인간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정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유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사람들의 악력이 세면 셀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지만, 예술이라는 공간에서 구현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그들의 삶 그 자체에 데려다 주기 때문에 완전히 상반된 이해와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특별히 물질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단순히 어떤 감정적 보상을 물질의 취득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불안’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나와 타인, 세상과 나, 그리고 나와 나의 감정들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그 안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불안’을 개인적인 해결 방법이나 예술과 같은 여과의 과정만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안’의 대부분의 원인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들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감정적 고통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현대사회의 특징적 감정 문제는 개인적 해법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본질적인 ‘불안’과 ‘나약함’은 사회적 환경에 너무도 쉽게 노출되고 지배 받음과 동시에, 사회는 그러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개인과 사회는 서로 상보적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인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다. 이에 우리는 사회 모순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을 통해 거시적 해법으로 접근할 때에 비로소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시적 접근이 결국 우리 자신의 사고를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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